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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임으로 눈뜨기/책, 읽어서 지구 열바퀴

무라카미 하루키 - 해변의 카프카(상)


무라카미 하루키 - 해변의 카프카(상) 



해변의 카프카(상)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사상사 | 2010-08-0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5세 소년은 아이의 종점이며 어른의 시발점인 인산의 순수원형!...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역 앞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체육관에 간다. 물론 나는 긴장하고 있다.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이 평일 한낮에 혼자 체육관에 가는 것을 누군가가 보고 수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곳은 뭐니뭐니 해도 낯선 도시인 것이다. 사람들이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입구에서 말없이 요금을 지불하고 로커 열쇠를 잠자코 받아 든다. 로커룸에서 운동용 반바지와 가벼운 티셔츠로 갈아입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근육을 풀고 있는 동안에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간다. 나는 나라고 하는 틀 속에 들어 있다. 나라는 존재의 윤곽이 찰카닥하는 작은 소리를 내면서 딱 하나로 겹쳐지며 자물쇠가 채워진다. 이제 됐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언제나 내가 있어야 하는 장소에 있다. 


- P110 _ 제 7장 백 년 뒤에 남는 것 中 -

 



멍한 눈으로 회사에 들어서서 사무실에 앉았을 떄,

그리고 다시 멍한 눈으로 회사를 빠져나와 요가 학원에서 요가를 할 때-

나도 이런 기분을 느낀다.


도시 속 삶에서의 불안감이 안정으로 바뀌는 순간.

그리고 그 감정에 중독되어 있는 나.






나는 열람실로 가서 버턴판 <<아라비안나이트>>를 계속 읽는다. 늘 그렇듯이 일단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도중에 그만둘 수가 없다. 버턴판 <<아라비안나이트>>에는 내가 옛날에 도서관에서 읽은 아동판과 같은 이야기도 들어 있지만, 이야기 자체가 길고 에피소드도 많으며 세부적으로 복잡하게 뒤얽혀 있어서 도저히 같은 이야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훨씬 더 매혹적이다. 외설스럽고 난폭하고 관능적인 이야기, 이해를 초월한 이야기도 잔뜩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마치 마법의 램프에 들어간 거인처럼) 상식의 틀 안에 들어앉지 않는 자유로운 생명력이 충만해 있어, 그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역 구내를 돌아다니는 무수한 얼굴없는 사람들보다, 천 년도 전에 쓰인 황당무계한 이야기 쪽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된다.


- P113 _ 제 7장 백 년 뒤에 남는 것 中 - 


 


나도 낯선 살아있는 내 주변 사람들 보다는, 책 속에서 더욱 생생한 생명력을 만난다.

어느 쪽이 허구일까?

빛을 잃어버린 눈을 하고 거리를 서성거릴 것 같은 주인공 카프카의 감정이

내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운다. 참 괴상한 일이다.






 “카프카는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복잡한 기계에 관한 것을 순수하게 기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 “ 나는 다시 한참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카프카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을 어느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의 세부에 대한 설명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을 잘 표현했지요.”  ………(중략) 나는 카프카의 소설에 대한 일반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나는 매우 구체적인 사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했을 뿐이다. 그 복잡하고 목적을 알 수 없는 처형 기계는 현실의 내 주위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은 비유나 우화가 아니다. 하지만 아마 그것을 오시마 상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어떤 식으로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P115 _ 제 7장 백 년 뒤에 남는 것 中 //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유형지에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오시마상과 대화한 후, 카프카의 독백 –



“네가 말하고 싶은 것, <곻>라는 소설은 <<산시로>> 같은, 이른바 근대 교양소설과는 구성이 많이 다르다는 말인가? “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산시로는 이야기 속에서 성장해 갑니다. 벽에 부딪히고, 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극복해 가려고 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고후>의 주인공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중략) 그리고 적어도 겉에서 보기에는 광산에 들어갔을 때와 거의 같은 상태로 밖으로 나옵니다. 즉 그에게는 스스로 판단했다든가, 선택했다든가, 그런 건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라고 할까, 무척 수동적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인간이라는 건 실제는 그렇게 쉽게 자기 힘으로 사물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 P206 , 




이 것이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역경과 고난을 뚫고 성장하는 캐릭터들,

마치 이복자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왕자님을 만나 공주가 되는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그런 극적인 우화 속 주인공에 익숙하다.


하지만 미적지근하고 때론 이해할 수 없는 괴기한 생각을 가진 수동적인 인간이 주인공인

하루키의 소설이 먹먹하고 답답한데도 손에서 뗄 수 없는건 왜일까.

허무주의 , 하지만 내 마음 속에도 가끔 이는 감정..




주인공은 부잣집 아들인데, 연애 사건을 일으켰다가 그것이 잘 안되자 모든 것이 싫어져서 가출을 합니다. 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 수상쩍은 사내가 갱부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자, 그 길로 얼떨결에 따라갑니다. 그리고 아시오 도잔(구리를 파는산-역주)에서 일하게 됩니다. 깊은 땅속으로 들어가서, 그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체험을 합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도련님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 같은 데를 기어 다닌 셈입니다.” (.. 중략.. )


 “그것은 죽느냐 사스냐 하는 체험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겨우 빠져나와 다시 본래의 지상 생활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그런 체험에서 무언가 교훈을 얻었다든가, 그래서 삶의 양식이 달라졌다든가, 인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든가, 사회 본연의 상태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든가, 그런 것은 별로 씌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인간적으로 성장한 반증 같은 것도 그다지 없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고. 그러나 뭐라고 할까. 그러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 카프카는 (프란츠) 카프카의 책을 읽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이거 간장공장공장장 아님 ㅋㅋㅋ )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고.


작가가 이 책 <해변의 카프카>를 통해 남기고 싶은 것도 바로 그런 감정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내겐 그랬다.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마음에 남는 책- 이었다.

아이 어려워 ..ㅠ